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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한국에서 교육이란? 어마무시한 교육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by 아임파인토리 2023.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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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공부만 해요! 학원만 6개 다녀요..." 한국의 과열된 교육열, 원인은?

 

 

각종 학원 건물 사이로 퀭한 모습의 학생들이 보인다.
학원 빌딩 숲을 표현한 삽화(사진 출처=세계일보)

 

●한국인, 극단적이고 (다소) 과격한 기질로 나라를 일으킨 민족!

 

 

-한국 경제의 눈부신 발전, 과열된 사교육 열풍…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발점을 찾아보자.

 

  사람들은 '경제 기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대표적 예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과 일본의 경제 부활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일구어낸 '한강의 기적'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지금부터 그 역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독일과 일본에는 잿더미만 남았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심하게 두들겨 맞고 쓰러져도 영양 섭취를 제대로 하고 치료만 잘 받으면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듯이, 비록 잿더미만 남았다 하더라도 독일과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만큼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부강한 나라로 일어선 것은 하루 이틀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본과 독일은 150년 가깝게 쌓아 온 튼튼한 국력을 뒷받침으로 경제 대국이 된 것이었다. 

  반면에 한국을 살펴보면, 조선 말기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고 5백 년 왕조는 기울 대로 기울어 국력은 쇠진했고 쌓인 부라고는 전혀 없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한민족은 철저하게 착취당해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땐 그야말로 빈털터리 국가에 가까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족상잔 한국전쟁까지 터져 그나마 남아 있던 기둥뿌리마저 완전히 박살이 나고 1953년 휴전되었을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당시 한국인 1인당 소득이 단돈 67달러였다. 길거리에는 거지 떼와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나라에는 희망이란 단어조차 사라진 듯 보였다. 그저 빈곤과 절망의 먹구름만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한국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망치와 호미를 잡고 악착같이 일을 했으며 무섭게 저축하기 시작하였다. 샛별 보며 나가서 저녁별 보며 돌아오듯, 잘살아 보려고 경제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한국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개발 독재'라는 명분 아래 군사 정권이 민주주의를 유보한 채 밀어붙이기식 경제개발 정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한국인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염원으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 드디어 1969년에는 북한의 경제력을 따라잡고, 1977년에는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한 뒤 불과 20년도 안 되어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비록 IMF 위기로 다시 1만 달러 이하로 떨어지긴 했지만, 한국 경제의 발전 속도는 기적이라는 말밖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1953년 단돈 67달러에서 1995년 국민소득 1만 달러의 기록까지, 불과 40여 년 만에 국민소득을 거의 200배 가까이 올린 것이다. 일본과 독일이 150년 가까이에 걸쳐 이룩해 온 경제 기반을 한국인들은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이뤄내고 말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만큼 놀라운 경제 성장을 기록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무이하다고 해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제 기적의 뒤에는 극단적이고 과격하며 오기와 끈기로 똘똘 뭉쳐진 한국인의 기질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 

  두 번째로 교육열을 살펴보면, 예부터 한국인들은 학문을 숭상했고 지배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인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계급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양반의 자제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평민들의 자제는 기술직과 전문직에만 국가고시를 거쳐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관직, 즉 벼슬길에 올라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계급은 양반에 국한되었으며 평민들은 물론 극히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출(첩의 자식)도 과거 응시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는 특권층이 양반 계급에만 열린 인재 등용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특권 계급이었던 양반은 완전히 무너지고 신분 제도 또한 무너져 한국인들은 갑자기 신분상 평등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인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이 관직이 주어졌지만, 관직은 곧 벼슬이고 출세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신분제 철폐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그런데 적어도 고등 교육을 받은 자에게만 관직의 기회가 주어지니 배우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교육 열풍이 불어닥쳐 가난한 농민들도 소 팔고 논 팔아 자식을 가르쳤다. 출신 성분이야 어떻든 머리 좋고 많이 배우면 출세할 열린 기회의 사회가 되자 교육만이 신분 상승과 부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지금까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교육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식민 통치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대학에 가는 학생이 하나라도 나오면 온 마을의 경사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간 뒤에 한국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많은 인재가 들어서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많은 인재가 필요해지자 대학교의 정원이 많이 늘어나고 모두가 앞다투어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학생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렇게 되어 대학 졸업장만 따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던 시대는 가고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와야만 출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자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혹독한 입학시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외 열풍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유교권인 동아시아에서는 훌륭한 사람은 실력만 있어서는 안 되고 교양과 인격을 고루 갖춰야 한다는 전인 교육이 중시되는 만큼 입시를 위한 과외 외에도 어렸을 때부터 음악, 미술 등은 물론 태권도, 유도 같은 운동까지도 과외를 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국이 학원의 숲으로 뒤덮여 있고 과외나 학원 공부를 학교 수업 외에 따로 하지 않는 초중고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교육 공화국이 되었다. 과외는 과외를 낳고 사교육을 위한 사교육을 받으며 학생들은 학생대로 부모는 부모 대로 끝없는 소모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교육 열풍은 지금까지도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특성 경제·교육 부분을 살펴보았다.

(내용 참고 및 출처: 먼 나라 이웃 나라-9권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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